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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최기일
저자 최기일
1922년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는 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는 동안 반일감정과 민족주의의식이 싹텄다. 1941년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입학하였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조선인 학도병징집령이 내려지자 이를 양심적으로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에 의해 평양 인근 승호리 시멘트공장에서 2년 동안 강제노역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을 하자 서울에 와서 돈암장에서 생활하며 리승만 박사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다. 1948년 도미 유학,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우스터대학 경제학과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5년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했을 때,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면서 가까이에서 그의 진면목을 지켜보았다. 현재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턴시에 거주하면서, 한국의 사회와 경제 발전을 위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목차
- 저자의 말
1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 27
2부 민족주의 의식의 학습기 ... 227
3부 가까이서 본 리승만, 김대중 ... 369
출판사 서평
우리에게 이토록 진실한 감동을 가져준 자서전이 있었는가?
일제하의 조선에서 출생, 해방의 감격을 누리고, 곧바로 도미 미국영주권자가 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최기일 박사의 생생한 역사적 증언
회고록, 혹은 자서전은 한 개인과 세계와의 치열한 대화의 기록이다. 회고록은 역사를 바라보는 특정한 주관의 기록인 동시에 세상에 대한 그 개인의 고유한 입장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 기록은 일면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구체적 진실을 언제나 겨냥하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한 개인의 회고록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개인사적 고백의 의미를 넘어 일정한 시대를 증빙하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정보의 내용이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기록들이 참고자료로서 상대적으로 매우 희귀하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유년 시절의 추억으로 구성된다. 최기일은 평북 삭주군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최지흥은 그의 회고에 의하면 대단히 강직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소위 남한식의 부재지주(不在地主)가 아니고, 소작농들을 직접 지도하고 교육하는 기업가적 지주였다. 최기일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회고하는 당시(1920~30년대)의 생활상과 사회상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마치 세태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그의 관찰 속에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기독교가 조선의 농촌에 미친 영향과 이북 농민들의 다양한 생활상, 이를테면 장날과 명절 풍경, 결혼 풍습, 남녀관계에서부터 기차와 병원, 학교 같은 근대적 풍경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192,30년대 평안북도 농촌(삭주군 대관동)의 생생한 실물들을 체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의 1부는 20세기 초엽 평북지역 풍속의 보고라 할 만하다.
최기일은 당시 고향 마을에까지 전파된 기독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그는 크리스마스의 기억, 푸른 눈의 외국인 목사로부터 받은 인상, 그리고, 찬송가와 성경의 구절 등을 기억하면서 뿌리 깊은 유교적 관습과 기독교의 교리와의 충돌로부터 야기된 경험들을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고백한다. 예를 들면,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웃들로부터 "너희는 돌에서 나왔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도들은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당시 사회를 지탱시키던 유교 최고의 교리 "효(孝)사상"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린 최기일은 "그렇다면 기독교사상은 효를 부정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이런 질문 자체는 사실, 근대적 여명기의 우리 사회에서 매우 희귀하면서도 가치 있는 질문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책의 2부는 그가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의 수학 시절과 게이오대학 입학과 함께 시작한 동경 유학 시절, 그리고 지원병훈련소와 평양 승호리 시멘트공장에서의 강제 노역 시절의 회고로 구성된다. 최기일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신의주고보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의식을 가슴속에 품게 되었음을 고백하다. 그는 이곳에서 후일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내는 김준엽을 만나 교유하게 된다. 신의주고보는 조선인 학생들만이 다니는 학교였지만 교사들의 대부분은 일본인 교사들로 채워졌다. 이곳에서 최기일을 비롯한 조선의 학생들은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게 된다. 최기일이 생생하게 전하는 당시의 학생들은 매주 월요일 조회 때마다 신사가 있는 곳을 향해 최경례를 해야 했고, 모든 수업을 일어로 받아야 했다.
최기일은 당시 일본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급우들을 경멸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으면서도, 조선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철저한 민족의식은 그가 게이오대학에 입학 일본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그는 스스로 조선인임을 떳떳하게 밝혔으며, 적국의 수도인 도쿄에서 일본의 패망을 간절하게 염원하게 된다.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는 조선 학도병 징집령을 받게 되지만, 일본 당국의 집요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양심적으로 거부한다. 일본 당국은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노동어용령을 적용해 그를 평양 부근의 승호리시멘트공장에 배치, 강제노역을 하게 한다. 이곳에서 2년 동안 최기일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굴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최기일은 상공을 가로질러가는 미국 비행기를 보면서,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기도 한다.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 같은 해방의 조짐을 발견한 것이다.
3부에서는 해방 직후 조선의 사회, 다시 말하면 이른바 해방정국의 분위기, 그리고 리승만을 비롯한 당대 정치인에 대한 회고와 1983년에 처음 만나 교유하게 된 김대중에 대한 회고로 구성된다.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고향에서 접한 최기일은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독립된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서울에 내려오게 된다. 그는 돈암장에 우연히 갔다가 윤치영에게 발탁되어, 리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가까이에서 리승만 박사를 지켜보면서 그가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조선의 현실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론을 무시하는 리 박사의 모습을 보면서 최기일은 많은 실망을 하게 된다. 돈암장을 방문했던 많은 유력한 정치인들에 대한 회상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는 윤치영은 조선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멋쟁이였고, 임영신은 너그럽지만 가끔 격렬하고 무모했으며, 이기붕은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최기일은 이기붕이 나중에 리 박사의 총애를 받고, 지위가 상승하게 되는 이유를 역설적이게도 그가 학식이 뛰어나지 않고, 무능하며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서 찾고 있다.
3부의 후반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술회가 이어진다. 최기일 박사는 1948년 미국에 유학을 온 후, 미국의 시민권자가 되는데, 1983년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게 된다. 그 이유로 최기일은 그가 조국의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이고 민주화를 향한 그의 헌신과 열망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대중의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김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며 끊임없이 모략하고 책략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김대중은 리 박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독선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최기일은 1987년 한국의 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선거의 패배와 함께, 김대중 지지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축적된 소신과 원칙에 의해, 현직 대통령이기도 한 김대중에게 고언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코앞으로 다가온 제16대 대통령선거와 맞물려 매우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세심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은 최기일 박사의 증언과 기록은 사료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20세기 초엽 조선 풍속의 보고인 동시에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갖춘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에 대한 혜안을 고루 보여준다.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의해, 조선인, 일본인, 미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파란만장한 최기일 박사의 개인사는 곧 우리나라의 복잡한 현대사를 은유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이제 80이 넘은 노인이 된 그는 여전히 조국에 대한 일관된 사랑을 표현하고, 분단의 현실에 의해 생이별을 해야 했던 부모에 대한 열렬한 희원으로 충만해 있어, 그의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뜨거운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50여 년을 나라 밖에서 살면서 바라본 조국의 현실에 대한 그의 분석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과 나아가야 할 바를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본문 소개
12월에 소작인들은 잇따라 소가 끄는 썰매에 우리 몫을 농작물을 싣고 왔다. 왜 12월이었을까? 북한에서는 12월에 눈이 모든 도로와 오솔길을 뒤덮는다. 눈에 덮인 도로는 썰매를 몰기에 가장 적합하다. 너무나 추워서 수소와 마부의 얼굴이 된서리로 온통 뒤덮여서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이다. 농작물의 우리 몫 외에 소작인들은 아버지에게 드릴 조선 술 한 병과 떡을 선물로 가져왔다. 답례로 우리는 그들에게 뜨끈뜨끈한 식사를 차려냈다. 대부분의 떡은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주었다. 나는 떡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날에 소작인들은 장을 보고 나서 별 용건도 없이 대개는 우리 집에 들렸다. 그들의 대다수가 우리 집 방문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국수 한 그릇을 점심을 대접하도록 하셨다. 장날이 아닌 날에도 소작인들은 아무 용건이 없이 찾아와서는 두어 시간을 거실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대개 그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그들은 우리 거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음에 틀림이 없다. 아버지는 온 가족에게 그들을 반갑게 대하라고 지시하셨다.
-1부
매월 첫 월요일에는 전교생이 일본인 거리에 있던 신사에 참배하러 가야 했다. 기독교회와는 달리 그리고 이교도의 사원답게 신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만한 실내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신사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일본인 신관(神官)이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영창하는 동안 우리는 체육 선생님의 명령을 받고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누구에게 절하고 있는지 또는 신관이 무엇을 영창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왜 신토의 신들을 우리가 섬겨야 하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신토 신관이 무엇을 음창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신사 안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월에 한 번 있는 신사 참배는 하루의 오전 시간을 다 차지했는데, 그것은 일부 학생에게는 작은 보상이었다. 우리는 신사에 셀 수 없이 다녔고 선생님들은 신토에 관해서 끊임없이 강의했다. 이유도 없이 일본은 신들의 나라라고 되풀이해 말해서 우리는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때로는 일본인이 왜 일본은 신들의 나라인가에 관해서 글짓기를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창작이었다. 신들의 나라라는 말을 우리는 다른 쪽 귀로 흘려 버렸다.
-2부
외모 면에서 리 박사와 겨룰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바로 몽양 여운형(呂運亨)이었다. 여운형은 리 박사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여와 함께 있을 때 리 박사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해방 이전에 두 사람이 서로 만났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모 기자가 나에게 말하기를 군정청장의 저택에서 열렸던 가든파티에서 여와 리 박사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여가 고급 장교들과 참 잘 어울리고 대화하는 모습은 볼 만한 광경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루는 리 박사가 여운형에 대해 "그는 기회주의자요"라고 평하는 것을 나는 우연히 들었다. 당시 리 박사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과 임영신도 여운영에 대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여서 좀처럼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 당시 리 박사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박헌영이 아니라 여운형이었다.
-3부
이 회고록은 순(純)조선 사람이 아니라 해외에서 50여 년을 거주한 조선 사람의 회고록이다. 이 부분에 이 회고록의 특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을 보아야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을 나는 이 회고록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는 나의 이 회고가 역사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신의주고보와 학병 징용 시절에 관한 나의 회고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읽으면 당시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나는 우리 민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역사자료를 남기고 싶은 마음에 이 회고록을 썼다. 정확한 역사자료가 충분할 때 역사가들이 의미 있는 기록을 후세에 남길 수 있다. 역사자료가 빈약하고 부정확할 때는 역사가들이 신화적 역사를 만들고 후세인들은 그릇된 역사의 교훈을 받기 쉽다.
- 저자의 말
저자 소개
저자 최기일
1922년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는 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는 동안 반일감정과 민족주의의식이 싹텄다. 1941년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입학하였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조선인 학도병징집령이 내려지자 이를 양심적으로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에 의해 평양 인근 승호리 시멘트공장에서 2년 동안 강제노역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을 하자 서울에 와서 돈암장에서 생활하며 리승만 박사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다. 1948년 도미 유학,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우스터대학 경제학과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5년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했을 때,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면서 가까이에서 그의 진면목을 지켜보았다. 현재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턴시에 거주하면서, 한국의 사회와 경제 발전을 위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기본정보
ISBN | 9788984981997 |
---|---|
발행(출시)일자 | 2002년 11월 30일 |
쪽수 | 494쪽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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