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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벤야민에게 사진이란 당대 기술과 예술이 집약된 새로운 매체이자 정치적 전망의 창이었다. 벤야민은 사진이 인간 지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현실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인식하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진에 찍히는 현실이 눈이 보는 현실과 다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강경한 사진 반대론자였던 보들레르에 비해, 벤야민은 기존 예술이 감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매체로서의 사진, 가짜 아우라가 제거된 사진에 포착된 시대상과 인물상에 주목한다.
벤야민은 사진의 재현적 기능과 폭로적 기능에 주목하면서 사진의 정치적 가능성에 천착한다. 현실을 기만적으로 재현하거나 이상화하는 기존 예술에서 벗어난 사진에 심층으로 파고드는 설명글을 붙이는 방식을 통해 사진에 ‘혁명적 사용 가치’가 있을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책에 실린 벤야민의 어린 시절 사진과 그가 수집한 사진, 당시의 인물들의 사진, 사진엽서에 얽힌 그의 추억을 통해 사진이라는 놀라운 매체가 가져온 여러 변화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작가정보
엮음 에스터 레슬리
엮은이 에스터 레슬리는 런던대 버크벡 칼리지의 정치미학 교수. 부모는 트로츠키주의자였고, 조부는 독일인 아나키스트, 조모는 여성 참정권 투쟁으로 체포당한 이력이 있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급진적이라고 일컬어지던 서식스 대학에 진학했고, 벤야민과 테크놀로지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벤야민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과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동시에 지양하는 역사 유물론적 해석으로 최근의 벤야민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주저인 『발터 벤야민, 순응주의의 압도Walter Benjamin: Overpowering Conformism』와 함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Hollywood Flatlands: Animation, Critical Theory and the Avant-garde』, 『합성된 세계Synthetic Worlds: Nature, Art and the Chemical Industry』, 『액체 크리스털Liquid Crystals: The Art and Science of a Fluid Form』 등을 통해 현대 대중문화의 시지각을 분석하고 있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옹호A Defenc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와 『발터 벤야민 아카이브Walter Benjamin: The Archives』를 영어로 옮겼다.
저자 발터 벤야민는 유럽 모더니티가 낳은 최고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중 하나. 독일 사회에 동화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베를린 토박이였지만, 인생에서 긴 시간을 유학생, 여행자, 망명자로 떠돌았다. 1920년대 초에 내놓은 세 편의 연구 논문은 각각 낭만주의와 괴테와 바로크 희곡 분야에서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으로 학계에 진입하는 데 실패한 후에는 소비에트연방의 새로운 문화와 파리 문화계의 아방가르드 양쪽 다를 옹호하는 안목 있는 바이마르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대중문화를 처음으로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바이마르 시대의 벤야민, 그리고 그의 친구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였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의 작은 역사」는 바로 이 시기의 역작 중 하나다. 나치를 피해 독일을 탈출한 후에는 주로 파리에서 가난한 망명 작가 생활을 이어 가면서 『파사주 작업Das Passagen-Werk』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이 어마어마한 인용문 뭉치를 글로 엮는 데 필요한 여유를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파사주 작업』의 의도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도시 상품자본주의가 출현한 양상을 문화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었고, 「사진의 작은 역사」는 바로 이 『파사주 작업』의 ‘예비 작업’이었다. 벤야민은 개별 사진 작업들과 사진이라는 현상 전체에 대한 획기적이고도 뛰어난 논의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탁월한 사진 비평가이자 혁신적 사진 이론가이기도 했지만, ‘사유 이미지’라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사유의 순간을 찍는 철학적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그 문체를 대표하는 글이 바로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Berliner Kindheit um 1900』이라는 유럽 모더니즘의 두 걸작이다. 1940년 나치가 프랑스로 진격하자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어 자살한다.
역자 김정아는 영문학 석사, 비교문학 박사. 서울대, 연세대, 한국외대에서 문학이나 번역으로 수업을 하기도 한다. 옮긴 책으로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슬럼, 지구를 뒤덮다』, 『죽은 신을 위하여』, 『눈과 마음』, 『오만과 편견』, 『감정 자본주의』, 『폭풍의 언덕』,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역사?끝에서 두 번째 세계』, 『걷기의 인문학』 등이 있다. 최근 제닝스와 에일랜드가 공저한 벤야민 평전 Walter Benjamin : A Critical Life(근간)를 옮겼다.
목차
- 머리말 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_에스터 레슬리 07
사진의 작은 역사(1931) 77
화보 신문은 무죄!(1925) 151
그레테 콘에게(1927년 10월 16일) 159
꽃들의 새로움(1928) 169
거울 속의 도시?작가들과 화가들이 ‘세계의 수도’ 파리에 바치는 사랑의 고백들(1929) 187
성곽(1932~1934년경) 205
지젤 프로인트의 『19세기 프랑스 사진?사회학적?미학적 고찰』에 대한 서평(1938) 219
감사의 글 229
사진 출처 230
옮긴이 해제 231
책 속으로
복제 기술(예컨대 사진)은 휴머니티에 도전하면서 기술과 자연과 사회의 역기능적 관계(인간을 소품으로 전락시키는 관계)를 가시화한다. 인간의 소품화 경험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하는 노동 계급의 경험(“기계 부품”이 되는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유복한 가정에서 잡동사니 소품으로 빽빽이 채워진 거실의 진갈색 협탁 위에 장식으로 올려놓는 무거운 사진 앨범에 들어갈 자존감 증진용 사진을 제공하는 상업 사진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곧 소품이다.
벤야민의 유년기는 사진을 접하는 좀 더 대중적인 통로, 곧 화보 신문이 출현한 때이기도 했다. 관련 기술이 급속히 발전한 덕분이었다.… 표지의 그림 이미지는 곧 사진 이미지로 바뀌었고, 1901년부터는 내지에도 사진이 실렸다. 보도 사진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사진 기자, 사진 사서라는 직업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_9쪽 「머리말―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
사진은 객관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화가처럼 대상을 주관적으로 미화하거나 기량 부족이나 기벽 탓에 대상을 왜곡할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기계적 공정으로서의 사진은 세계와 모종의 직접적, 반영적 관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여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렇지만 이 객관은 때로 미끼로 전락할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이 사회의 실상 내지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사진이 진실을 전달하는 순간도 있고 사진이 거짓을 폭로하는 순간도 있지만, 사진이 피사체의 유의미한 면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사진 기술에는 표층을 충실히 전달하는 능력이 있는데, 표층은 심층과 다를 수도 있고 심층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_36~37쪽 「머리말―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
사진은 사회 작용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작용들의 원인이기도 한, 획기적인 그 무엇이다. 예술이 스스로의 사후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학으로 허둥지둥 뒷걸음질 친 것은 사진 때문이다. 새로운 소재/피사체subjects를 재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도 사진이고, 리얼리즘과 현실의 문제, 표층과 심층의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진이다. 가치를 묻는 질문(가격이 얼마냐,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을 하게 만든 것도 사진이고 수용자(갤러리에 가서 시지각 문화를 관람하는 수용자가 아닌, 매체에 동화된 수용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도 사진이다.… 사진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삶은 변하고 있었고, 벤야민은 삶이 더 변할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다.… 사진은 현재의 순간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현재는 사진에 찍힌 순간부터 과거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이상한 변증법이다. 아무리 새로운 순간도 사진에 찍히면 역사적 기록이 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운명이다. 현재라는 한순간의 이미지는 역사를 통해 극복될 수 있고, 사진은 기억의 부속물이 될 수 있다. 모더니티의 시대는 기술력에 의지하지 않는 기억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 기억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기술력에게 빼앗긴 듯한 시대다.… 사진과 영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결정한 것은 전통이 아니라 사진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었다. 사진과 영화가 현대 생활의 필요 불가결한 일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진과 영화가 우리 상상을 좌우하게 되었다는 말은 사진과 영화가 우리 내면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_44~47쪽 「머리말―발터 벤야민과 사진의 탄생」
카메라에 찍히는 대상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무의식 공간이 찍힌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놓고 대충 이러저러하다 평하는 일이 이미 꽤 흔해졌다고는 해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딜 때 사람의 동작이 초 단위로 어떻게 바뀌느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시지각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이 공간을 열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사진의 스냅 촬영과 화면 확대다. 충동의 무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정신분석이듯, 시지각의 무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은 사진이라는 뜻이다. 공학의 건축 구조나 의학의 세포 조직은 정취가 깃든 풍경화나 영혼이 깃든 초상화보다는 카메라와 원래 더 친하다. _98~99쪽 「사진의 작은 역사」
출판사 서평
“미래의 까막눈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라즐로 모호이너지Lazlo Moholy-Nagy
“사진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삶은 변하고 있었고, 벤야민은 삶이 더 변할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다. 그가 사진에 ‘혁명적 사용 가치’가 있을 가능성, 사진이 사회의 해체와 재건에 일조할 가능성을 구상해 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에스터 레슬리Esther Leslie
◈ 발터 벤야민과 사진
탁월한 철학자이자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게 사진은 당대 기술과 예술이 집약된 새로운 매체이자 정치적 전망의 창이었다. ‘벤야민과 사진’이라는 키워드 아래 사진을 다룬 그의 다양한 글들을 엮은 신간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는 벤야민에게 사진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벤야민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마련한 영국의 정치미학자 에스터 레슬리(Esther Leslie)는 벤야민의 사진 관련 글 일곱 편을 선별하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글들은 길이도 종류도 밀도도 제각기 다르다. 「사진의 작은 역사」는 벤야민이 사진에 대해서 쓴 가장 길고 대표적인 글이며, 벤야민이 평생에 걸쳐 완성하고자 했으나 끝내 미완으로 남은 『파사주 작업』의 ‘예비 작업’이라 할 만큼 중요한 글이다. 「그레테 콘에게」는 친구 부부에게 보낸 편지이고, 식물 사진을 통해 사진의 재현적 기능을 논한 「꽃들의 새로움」은 문예지에 실린 기사, 파리와 사진의 관계를 다룬 「거울 속의 도시」는 여성지에 무기명으로 실은 글이며, 「지젤 프로인트의 『19세기 프랑스 사진』에 대한 서평」은 학술지에 게재된 짧은 서평이다. 대중지의 사진에 대해 쓴 「화보 신문은 무죄!」와 사진엽서의 매력을 다룬 「성곽」은 생전에 게재되지 못한 글이다. 이 가운데 다수가 에스터 레슬리에 의한 최초의 영어 번역인 것은 물론이고 최초의 국역이기도 하다. 이 불균질한 글들의 틈은 엮은이 에스터 레슬리의 깊이 있는 해설과 용어 설명 그리고 번역자가 추가로 작성한 충실한 용어 설명과 해제로 메워진다.
이 책을 통해 사진/매체 비평가/이론가로서의 벤야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유 이미지’라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한 철학적 사진작가로서의 벤야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벤야민의 어린 시절 사진과 그가 수집한 사진, 당시의 인물들의 사진, 사진엽서에 얽힌 그의 추억을 통해 사진이라는 놀라운 매체가 가져온 여러 변화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 사진이 바꾸어 놓은 시대의 풍경
벤야민의 유년기는 이미 사진이 일상생활과 예술, 기술, 언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사진관에서 어색한 차림을 하고 과도하게 장식적인 배경 앞에서 찍은 사진 액자를 가정에 세워 두었고, 신문의 표지와 내지를 장식하던 그림은 사진으로 대체되었으며, 전통적 회화와 예술은 사진에 위협받고 있었다. 벤야민이 나치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까지 활동하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당시 사진 문화의 최전선이었다. 난해한 논문으로 인해 학계 진입에 실패하고 기고와 비평 작업을 하던 벤야민이 사진에 주목하고 사진가들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벤야민은 이후 사진 관련 여러 저술에서 사진 기술과 복제 이미지, 피사체로서의 인간, 사진을 보는 시선, 사진의 시간성, 사진가의 경제적 상황, 회화와 사진의 관계, 아우라 개념과 사진 등을 다룬다.
벤야민은 사진이 인간 지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현실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인식하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진에 찍히는 현실이 눈이 보는 현실과 다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사진에는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 포착될 수 있으며, 모종의 증거가 감춰진 현실의 이면을 폭로하거나 심층을 드러내 줄 수 있다. 카메라에는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무의식 공간이 찍히며, 카메라는 시지각적 무의식을 포착한다. 사진을 찍고 사진에 찍히는 경험은 다른 기계류를 다루는 동작에 활용되기도 한다. 사진의 출현이 예술에 가져온 변화는 거의 위협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강경한 사진 반대론자였던 보들레르에 비해, 벤야민은 기존 예술이 감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매체로서의 사진, 가짜 아우라가 제거된 사진에 포착된 시대상과 인물상에 주목한다.
◈ 사진으로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벤야민은 사진의 재현적 기능과 폭로적 기능에 주목하면서 사진의 정치적 가능성에 천착한다. 현실을 기만적으로 재현하거나 이상화하는 기존 예술에서 벗어난 사진에 심층으로 파고드는 설명글을 붙이는 방식을 통해 사진에 ‘혁명적 사용 가치’가 있을 가능성을 모색한다. 벤야민은 피사체를 허구적으로 보정하는 사진 기술과 그것이 낳는 상업적, 정치적 기만을 비판하고 특정한 계급과 시대의 유형적 속성을 드러내는 사진 작업(아우구스트 잔더, 외젠 앗제 등)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다가올 파시즘의 시대를 예견하듯이 권력자와 예술지상주의에 의해 사진이 프로파간다로 오용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사진의 가능성에 희망을 건 벤야민의 전망은 결국 그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했다. 벤야민이 독일을 탈출한 1933년은 이러한 전망이 담긴 「사진의 작은 역사」를 쓴 지 2년 후였고, 유럽 탈출에 실패하고 자살한 1940년은 지젤 프로인트의 책 서평을 쓴 지 2년 후였다. 벤야민이 정치적 ‘훈련 교본’으로 평가한 잔더의 사진은 나치에게 소각당했고, 최고의 ‘인간상’이 출현했다고 칭송한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에 의해 이미 변질되었고 스탈린 체제 아래 사진은 권력자의 이미지를 보정하고 정적을 삭제하는 데 쓰이기에 이르렀다. 프로파간다와 상품자본주의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사진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이 완전히 잊힌 지금이 바로 벤야민의 정치적 모색에 다시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책속으로 추가]
최근 사진 유파의 가장 눈에 띄게 잘한 일, 곧 피사체를 아우라로부터 해방시킨 일은 실은 앗제가 시작한 일이다.… 아우라가 뭐겠는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실로 짠 특별한 직조물이라고 할까,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단 한 번밖에 나타나 주지 않는 먼 곳이라고 할까. 어느 여름 한낮, 지평선에 펼쳐지는 산마루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고,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가지가 있다. 그 산마루나 그 나뭇가지에 머물러 쉬는 그 한낮을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먼 곳이 나타나는 때가 있다. 한순간일 수도 있고 한 시간일 수도 있는 그때가 바로 그 산의 아우라, 그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하는 때다. 그런데 대상을 자기 눈앞, 아니 대중의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놓는’ 성향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하다. 복제를 통해 대상의 일회성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듯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대상의 형상Bild, 아니 모상Abbild을 향한 욕망은 날마다 점점 더 막강하게 확산된다. 여기서 말하는 모상, 예를 들어 화보 신문에 실리는 사진이나 영화관에서 트는 뉴스 화면은 형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모상에 찰나성과 반복 가능성이 얽혀 있다면 형상에는 일회성과 영속성이 얽혀 있다. 대상을 둘러싼 껍질을 부술 수 있다는 것, 아우라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형상들을 알아보는 지각이 발달해 있다는 표시, 일회적인 형상 앞에서도 복제를 이용해 동일한 형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지각의 표시다.
_119~121쪽 「사진의 작은 역사」
그렇다고 『베를린 화보 신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지금 유럽 대륙 전체에 조성돼 있는 대중 언론의 조건하에서 『베를린 화보 신문』보다 좋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다들 알지 않나. 『베를린 화보 신문』이 자랑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미’는 은행원, 여비서, 옷 장수의 산만하기 짝이 없는 저질 주의력을 일주일에 한 번 한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오목 거울 같은 사실성, 오로지 바로 그 사실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들 알지 않나. 이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이 『베를린 화보 신문』의 힘이면서 동시에 정당성이다.… 대중 교육이라는 궁극적으로 극히 프티부르주아적인 이념 나부랭이를 떠들어 대는 것보다는 현재성의 아우라를 머금은 것들을 그냥 보여 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고, 간접적이기는 해도 길게 보면 더 보람 있는 일이다. 밑바닥 본능에 대한 사변에 100퍼센트 의지하는 저 숱한 싸구려 현재성이 아니라 다만 50퍼센트라도 기술력의 성실성에 의지하는 현재성,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는 현재성이 『베를린 화보 신문』에 있다고 한다면, 이 신문으로부터 글을 청탁받을 가능성이 없는(전혀 없는!) 필자라고 해도 악의 없는 중립성을 잃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_156~157쪽 「화보 신문은 무죄!」
무수한 눈동자와 카메라에 이 도시의 거울상이 맺혀 있다. 파리가 ‘빛의 도시Ville Lumi?re’가 된 것은 파란 하늘 때문만도 아니고 저녁 큰길가의 네온사인 광고 때문만도 아니라는 뜻이다. 파리는 거울 속의 도시다. 차로 블록은 거울처럼 매끄럽고, 모든 식당의 앞문짝 유리는 여자들이 가장 자 주 쓰는 거울이다. 파리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이 거울로부터 나온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받기 전에 이미 열 개의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다. 남자도 특히 카페 안에서는 거울의 홍수에 잠겨 있다. 거울은 실내를 좀 더 밝게 해 주고, 파리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볼 수 있는 그 모든 비좁은 칸막이 공간에 탁 트인 느낌을 준다. 거울은 이 도시의 정령이 깃든 물건이요, 이 도시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방패다. 그 방패에는 지금까지도 모든 문학 유파의 상징물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_198~199쪽 「거울 속의 도시」
특정 시대의 사회 구조는 특정 시대의 작품을 돌아보는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작품의 의미를 정의할 때 그 작품을 낳은 시대의 사회 구조를 감안하면서 정의한다는 것은, 그 시대로부터 까마득히 동떨어져 있는 시대들에게 그 시대로 가는 통로를 제공할 힘이 그 작품에 있다는 뜻이고, 그 작품의 의미를 그 작품의 영향사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다. 12세기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준 것은 단테의 작품이었고, 엘리자베스 시대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준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_226~227쪽 「지젤 프로인트의 『19세기 프랑스 사진』에 대한 서평」
바이마르 지식인 벤야민에게 사진은 인식의 훈련장이자 혁명의 시험대였다. “사진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삶은 변하고 있었고, 벤야민은 삶이 더 변할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다. 그가 사진에 ‘혁명적 사용 가치’가 있을 가능성, 사진이 사회의 해체와 재건에 일조할 가능성을 구상해 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단, 벤야민에게 그 내기는 자기 삶을 소모하는 내기였다.… 더구나 그 내기는 일단 지는 내기였다. 벤야민이 독일 탈출 길에 오른 1933년은 「사진의 작은 역사」가 나온 다다음 해였고, 벤야민이 유럽 탈출 길에서 자살한 1940년은 「지젤 프로인트의 『19세기 프랑스 사진』에 대한 서평」이 나온 다다음 해였다. 벤야민이 정치적 “훈련 교본”으로 선전했던 잔더의 사진은 나치에게 소각당한 후였고, 벤야민이 최고의 “인간상”이 나온 토양으로 칭송했던 러시아혁명은 상속자의 이미지를 보정하는 에어브러시로 전락한 후였다.
미국 입국 비자가 있었지만 프랑스 출국 비자가 없었던 벤야민은 결국 유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역사 뒤로 사라진 듯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이 그 후 한 세대 만에 초(超)유럽 학계에서 첫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것,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명성이 전공 독자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점점 확고해진다는 것은 그 내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_241~243쪽 「옮긴이 해제」
기본정보
ISBN | 9791162203132 |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03월 20일 | ||
쪽수 | 244쪽 | ||
크기 |
120 * 199
* 20
mm
/ 338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On Photography/Walter Benjamin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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