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맛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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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페이지마다 투명한 공기와 청량한 햇살, 잘 익은 과일 향과 갓 구운 빵 냄새와 신선한 커피 향이 배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나 무심코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된다. 단정한 문장과 간결한 언어 사이로 조붓한 골목과 광활한 초원과 가라앉는 섬과 빙하의 길과 무수한 별이 내리는 밤의 사막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작가정보
목차
- prologue
Lost&Found - 볼로냐
프레고, 프레고 ? 포지타노
뒤섞인 기억 - 베니스
초승달의 크루아상, 두 개의 방 - 피렌체
떠나간 고양이들의 밤 - 니스
팬케이크의 부엌 -엑상프로방스
할아버지의 커피 - 아비뇽
마카롱의 아침 ? 파리
그것은 마법의 순간 - 볼리비아
주저하는 토스트 - 인도
바다 위의 식탁 ? 발틱해
사우나의 밤, 무민의 아침 - 헬싱키
빙하 맛의 사과 - 노르웨이
시나몬 시리얼과 바닐라 요거트 - 스웨덴
책 속으로
진한 커피가 몸속을 타고 흐르자 쓰지 않던 근육들이 하나둘 살아나기 시작한다. 아침 일찍 눈을 뜨고, 부지런히 샤워를 하고, 낯선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남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오늘도 끝내주는 날씨군, 하며 식당 안에 가득 퍼진 레몬 빛 햇살과 신선한 바람에 감동한다. 여행의 근육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저녁과 새벽 사이, 홀로 밤을 보내는 데 익숙해져 있던 근육들이 달그락, 달그락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분이 간질간질하다. 커피를 더 마실 수 있겠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프레고, 프레고 하며 다시 한가득 주전자를 채워준다. 프레고의 아침이 시작된다.
많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아질 때가 오지.
오래 전, 여행 선배들이 말했다. 그 말은 신묘한 점쟁이의 예언처럼 딱 맞았다.
많이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시간 들여 천천히 보고 싶다. 먹는 것과 머무는 곳에 좀 더 돈을 쓰고 무엇을 보기 위해 조바심 내거나 안달내지 않고 싶다. 전전긍긍과 근심걱정은 돌아가면 차고 넘치게 할 수 있다.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니스에 머무는 동안 생활은 간소해진다. 바게트 빵과 와인 한 병, 그리고 과일 약간. 매일 지나치는 시장과 집 앞 가게에서 사는 것으로 족하다. 집을 쓸고 닦아 청결을 유지해야 할 의무도 없고, 한꺼번에 일주일치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우고 비워내야 하는 고단함도 없다. 일상의 일들은 저만치 물러나고 유예의 시간이 조용히 흐른다.
고요한 사막에 어둠이 내리자, 검은 밤에 은빛 실로 짠 촘촘한 그물이 가득 드리워졌고 어느 순간 밤을 가로질러 길게 별이 하나 떨어지더니 하얀 유성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별이 떨어진 사막은 희미하게 빛나고 부드러운 모래는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아침 메뉴를 짐작해본다. 버터를 두르고 구운 식빵, 아니 그보다는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냄새다. 달걀과 우유에 적셔 구운 프렌치토스트가 아닐까. 거기에 마리가 직접 만든 잼과 막 내린 뜨거운 커피가 곁들여지겠지.
주방문이 열리고 마리가 소리쳐 부른다.
“아침 먹으러 와요!”
우리는 활짝 웃으며 맛있는 냄새가 나는 주방을 향해 달린다.
작은 섬에 하룻밤 묵었다. 숙소 주변에는 사과나무가 가득 서 있고 물기를 품은 잔디 위로 사과가 떨어져 있었다. 땅에 떨어진 건 먹어도 된다고 숙소의 직원이 말했다. 덜 여문 사과는 정신이 번쩍 나도록 새콤했지만 아삭, 하고 상쾌한 맛이 났다. 빙하의 맛일 것이다. 창밖으로 피오르드가 보였다.
여행을 다녀오면 대단한 이야깃거리나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마르코 폴로의 시대 때나 가능한 이야기고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만 잠시 들여다봐도 우유니 사막에 다녀온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사막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내게 여행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담장 위에 내려쬐는 햇살이 예뻤다거나 그때 부는 바람이 나붓했다거나 돌아오는 길에 무지개를 봤다거나 하는 기억을 수줍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내 눈에 띈 ‘뭔가’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이끌리는 ‘뭔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그 ‘뭔지 모르는’ 것이 내 눈에 문득 띄어, 내 안으로 슬며시 들어와 부드러운 눈처럼 조용히 쌓인다. 이따금 눈 위를 처음 걷는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발자국이 사뿐사뿐 나기도 해서 나는 그것을 홀린 눈으로 들여다본다. 내 눈이 머무는 대상은 대개는 작거나 오래된 것, 구석과 그늘인 경우가 많다. 아마도 내 취향은 음침한 것인가 보다.
하룻밤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창문을 열자 차갑고 푸른 공기가 밀려들었다. 담요를 두르고 주방으로 가서 가스 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린다. 우선은 뜨거운 커피를. 전날 먹고 남은 수프를 데워 조금 굳어진 빵과 천천히 먹고 나서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한 뒤 하얀 세상으로 산책 나가고 싶다. 이따금 창밖으로 눈 구경을 하며 하루 종일 틀어박혀 글을 쓰고 싶기도 하다. 뭔가 신비롭고 근사한 것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스웨덴에서 아침마다 먹던 시나몬 향 시리얼을 한 상자 사서 트렁크에 넣어 집으로 돌아왔다. 문득 스웨덴이 그리워지는 날, 찬장에서 상자를 꺼낼 것이다. 그릇장에서 작은 여름의 섬에서 산 나무 볼도 꺼낼 것이다. 마당의 사과나무가 보이는 창으로 푸른빛이 스며들던 여행의 아침을 떠올리며 시나몬 향이 나는 시리얼을 사각사각 먹게 될 언젠가의 아침을 나는 기다린다.
출판사 서평
오직 떠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떠난다.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고.
여행지의 조식이 여행의 1순위는 아닐지라도, 여행을 즐겁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꼽는 ‘조식 신봉자’이며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편인 저자의 집요한 조식의 기록이자 이상하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행기.
유럽의 여러 도시를 거쳐 인도, 남미 등의 머나먼 여행을 떠나 작고 사소한 풍경에 눈과 마음을 오래 둔 저자는 어딘가의 그곳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전설, 혹은 꿈처럼 조곤조곤 들려준다. 동트는 초원 위에서 인디오 아줌마가 끓여준 차와 프로방스의 노란 부엌에서 고양이와 겸상해서 먹는 팬케이크, 푸르스름한 새벽 기차역의 토스트와 짜이 한 잔, 창으로 손을 내밀어 따먹는 빙하 맛의 사과, 때로는 아침 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과일과 바게트로 간소하게 차려낸 아침. 책 페이지마다 투명한 공기와 청량한 햇살, 잘 익은 과일 향과 갓 구운 빵 냄새와 신선한 커피 향이 배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나 무심코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된다. 단정한 문장과 간결한 언어 사이로 조붓한 골목과 광활한 초원과 가라앉는 섬과 빙하의 길과 무수한 별이 내리는 밤의 사막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 누군가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우리 아침 먹을까요?
아침에는 달고 부드럽고 진한 것을 먹으며 하루를 견딜 준비를 하고 싶다.
여행의 시작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지에서의 조식을 사랑한다. 아직 아무도 쓰지 않은 신선한 공기 속에 맘껏 먹어요, 라는 다정한 말과 함께 차려진 소담한 아침 식사. 뜨거운 커피가 가득 담긴 주전자, 바삭거리며 부서지는 크루아상, 갓 구워낸 팬케이크, 부드러운 버터와 레몬즙 약간에 햇살 한 스푼 첨가한 잼, 바닐라 맛 요거트와 시나몬 향 시리얼, 그리고 아침 공기 속으로 손을 내밀어 딴 빙하 맛의 사과. 긴장과 피로가 서서히 사라지며 여행의 근육이 살며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행의 기억은 그런 사소한 아침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마법의 순간
스마트폰도 없고, 해외로밍도 안 하고, 구글맵도 번역기도 없이 여행서와 지도를 들고 떠난 여행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이야기처럼 신비롭고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여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지도와 메모한 주소만으로 길을 찾았다. 찾았다기보다는 헤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덕분에 낯선 이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작은 친절과 호의, 그런 것들을 골목 모퉁이에서 우연히 만났다. 대륙을 잇는 기차를 타고 밤의 국경을 건너고 아침에만 잠깐 열리는 국경을 걸어서 넘었다.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을 넘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건너,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여행, 그것은 마법의 순간.
여행하는 물고기
여행지에서 유독 홀로 혹은 함께 여행하는 여자들을 많이 만났다. 명절이라고 모인 친척들의 남자 없어? 결혼 계획 없어? 애 낳을 생각 없는 거야? 의 무차별 공격에서 도망쳐 떠난 홍콩 단체 여행에서 여자들로만 가득 찬 관광버스를 타고 돈독한 전우애 속에서 평화롭기 그지없는 여행을 한 적 있다. 여행을 떠난 여자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설렘과 생동감이 넘쳐 흐고 홀가분해 보였다. 이른 새벽 볼리비아 국경을 넘을 때는 인디오 여자가 말 없는 동행이 되어준 적 있다. 인디오 여자는 추위에 떠는 이방인에게 자신의 숄을 둘러주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비앤비 숙소에서 아침을 차려주던 이도, 골목길에서 손짓과 눈짓으로 길을 가르쳐주던 이도, 우유니 사막에서 고산증에 효험 있다는 코카잎을 나눠주던 이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밤하늘에 말없이 빛나는 별 같은 존재들이었다. 여행의 길을 담담하게 비춰주는 우연하고도 따스한 빛. 전반적으로 고통스러운 가운데에도 작은 기쁨이 간혹 있어 세상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숨을 쉬기 위해 물을 찾아 파닥이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여행을 떠난다.
별 것 아니지만 위로가 되는
푸른 새벽빛이 스며드는 낯선 거리에 도착해 뜨거운 커피 한 잔, 혹은 운이 좋다면 일찍 문을 연 식당에서 달걀을 곁들인 토스트를 먹는다. 아침이 밝아오고 신선한 공기가 천천히 몸 안을 관통했다. 고산증과 짜증, 간밤의 불면과 긴장을 견딜 수 있는 건 8할은 아침 식사 덕이었다. 초원 위에서 인디오 아줌마가 끓여준 따스한 차 한 잔과 아침 햇살이 드는 베키오다리를 바라보며 먹는 호텔 조식, 사막에서 하룻밤 보내고 먹는 모래 섞인 달걀 요리, 빙하 맛의 사과로 시작하는 외딴 섬의 하루, 처음 보는 과일에 도전하는 담대한 아침, 넉넉한 이탈리아 논나의 손맛, 그곳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신선한 공기와 이국의 햇살. 별 것 아니지만 그 별 것 아닌 것의 위로를 받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여행 뒤에 거창한 여행담이 생기거나 내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저 떠올려보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사소한 기억 하나 지니게 될 뿐. 서랍 안쪽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보고 싶은 작은 장면들, 그것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본정보
ISBN | 9791195592395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11월 21일 |
쪽수 | 248쪽 |
크기 |
130 * 188
* 21
mm
/ 326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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